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재즈 음악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그 이름을 떨친 거장 Louis Armstrong

by 하니번잡 2019. 6. 18.

Louis Armstrong - What a wonderful world ( 1967 )

https://youtu.be/CWzrABouyeE

 

I see trees of green, red roses too
I see them bloom for me and you,
And I think to myself, "What a wonderful world"
I see skies of blue, and clouds of white,
The bright blessed the day, and the dark say good night
And I think to myself, "What a wonderful world"
The colors of the rainbow so pretty in the sky.
Are also on the faces of people going by
I see friends shaking hands saying "How do you do?"
They're really saying "I love you"
I hear babies crying
I watch them grow
They'll learn much more than I'll ever known.
And I think to myself, "What a wonderful world"
Yeah,I think to myself, "What a wonderful world"
Oh,yeah



난 신록의 나무들과 붉은 장미들을 볼 수 있네.
난 그것들이 당신과 나를 위해 만발하였다고 생각해.
그래서 난 세상은 정말로 아름답다고 생각한다네.
난 부른 하늘과 하얀 구름을 본다네.
밝게 축복받은 낮과 잘자라고 말하는 밤
그래서 난 세상은 정말로 아름답다고 생각한다네.
하늘에 펼쳐진 아름다운 무지개의 색깔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도 있다네.
난 친구들이 손을 흔들며 "잘 지내나?"라고 묻는 걸 보지.
그들은 진정으로는 "당신을 사랑하네"라고 말하는 거라네.
난 아기들이 우는 소리를 듣고
그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지.
그들은 내가 알아온 것 이상으로 배울 것이고
그래서 난 세상이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한다네.
... 정말 세상은 아름다워.
... 정말로...

루이 암스트롱이 사용하던 악기

 


루이 암스트롱은 1901 년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 주의 뉴 올리언스에서 태어났다 .

당시만 해도 프렌체 쿼터 (French Quarter)로 대표되는 프랑스 문화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는

뉴 올리언스라서 그런지 우렁찬 울음 소리와 함께 태어난 아이의 이름도 프랑스 식인 루이 (Louis)로 지었다 .

루이의 아버지는 얼마 안 가 다른 여성과 바람이 나서 어린 아이와 엄마를 내팽겨치고 도망가 버렸다 .

10 대의 나이로 미혼모가 된 루이의 어머니는 온갖 잡일과 매춘까지 하면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다 .

루이 역시 어릴 때부터 신문 배달 , 청소를 도맡아 하면서 거리의 아이로 자라났다 .

뉴 올리언스라는 지역의 특성으로 루이는 온갖 떠돌이 뮤지션과 재즈 밴드 연주를 어디에서나 들으면서 자랐다 .

어린 루이 역시 악기 연주에 호기심을 가졌다 .

재즈 (Jazz)를 대표하는 뮤지션 한 명만 꼽으라면 , 순간 수많은 얼굴이 파노라마처럼 차르륵 스쳐 지나간다 .

초보자 입장에서 보자면 유명한 뮤지션 위주로 머리 속에 떠오르기 마련이다 .

재즈를 들었다 하는 이들은 대부분 마일스 데이비스 (Miles Davis)나 찰리 파커 (Charlie Parker)를 꼽는다 .

마일스 데이비스는 1940 년대부터 1980 년대까지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10 년마다

한 번 꼴로 재즈의 흐름을 죄지우지한 대부 (代父 )격의 인물이자 쿨 (cool)하고

반항적인 스타일과 태도로 유명한 스타였다 .

찰리 파커는 모던 재즈 (Modern Jazz) 스타일을 확립하였고 ,

비밥 (Bebop)을 통해 재즈의 예술성과 즉흥 연주를 확립한 인물이기에 별 이견이 없다 .

그러나 재즈 음악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그 이름을 떨친 거장은 루이 암스트롱이다 .

당대에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트럼펫 연주자였으며

음악의 가락을 가사 없이 입으로 따라 부르는 스캣송을 널리 퍼뜨려 재즈 보컬의 전형으로 만든 장본입이기도 하다 .

그리고 무엇보다 밴드의 악사들이 함께 연주하는 방식을 벗어나 하나의 악기가

따로 그 솜씨를 마음껏 펼치는 새로운 재즈의 연주방식을 처음으로 시도한 선구자이기도 합니다 .

그는 뉴올리언즈에서 태어나고 자라 , 그곳에서 활동하며 실력과 명성을 닦았습니다 .

그 가운데 한 남자의 총을 들고 거리로 나선 소년 루이는 새해 첫날을 맞이하는 들뜬 분위기에 휩싸여

허공에다 마구 총을 쏘았고 그 때문에 소년원에 들어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

그러나 그에게 소년원은 삶의 피난처이자 탈출구였습니다 .

그곳 밴드에서 처음으로 코넷을 배울 수 있었고 그로 말미암아 음악가의 길에 접어들게 된 것이다 .

소년원을 나선 그는 살기 위해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해야 하는

절박한 형편임에도 악기만은 절대로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

그러다가 코넷에서 트럼펫으로 악기를 바꾸면서 점점 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마침내 음악가로 생계를 꾸려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악보까지 읽고 솔로 연주도 제법 하는 루이는 당시 뉴 올리언스 재즈의 대표적인

밴드 킹 올리버 (King Oliver) 악단에 소속되어 재즈의 본고장에서 프로페셔널 뮤지션으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

1 차 대전이 끝난 후 군항 (軍港 ) 역할을 했던 뉴 올리언스에 불황이 찾아왔다 .

먹고 살 길을 찾아 고군분투하던 재즈 뮤지션들은 미시시피 강을 따라 올라가면 닿는 대도시인 시카고 (Chicago)로 진출한다 .

초기 스승이었던 킹 올리버 밴드와 함께 시카고에서 활동하던

루이는 자신의 진가와 실력을 보다 넓은 무대에서 펼쳐보라는

아내의 충고를 따라 뉴욕 (New York)으로 건너가 당대 재즈 뮤지션들을 배출하는

요람이었던 플레처 핸더슨 (Fletcher Henderson) 밴드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 .

피아노담당이었던 릴이 아내가 된다.

릴을 위해 연주하는 암스트롱

빅 밴드 사운드 속에서 치고 나오는 트럼펫 솔로 연주와 걸걸한 입담과 보컬까지 가미한

루이 암스트롱은 뉴욕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었다 .

루이 암스트롱 뿐만 아니라 콜맨 호킨스 (Coleman Hawkins), 베니 카터 (Benny Carter)

뉴욕 재즈 씬을 대표하는 뮤지션들과 한솥밥을 먹으면서 루이 암스트롱의 인기는 높아갔다 .

1925 "루이 암스트롱과 핫 파이브 (Hot Five)" 를 결성하면서

밴드 리더로 본격적인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다 . .

마피아들이 운영하는 대규모 클럽에서는 루이를 무대에 올리려 애썼다 .

금주법 시대에 이미 루이 암스트롱은 절정의 인가와 기량을 발휘하면서 재즈를 대표하는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

1933 년 금주법이 폐지되고 세계를 휩쓴 대공황의 여파로

마피아가 운영하는 클럽과 빅 밴드 재즈 씬이 몰락하는 비운을 겪지만

루이 암스트롱은 뉴욕 뿐만 아니라 새로운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메카로 뜨고 있던

로스 앤젤레스로 진출하여 영화에도 출연하면서 변함없는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

1940 년대 비밥이 등장하면서 재즈 씬의 지도가 완전히 뒤집어졌을 때도

루이는 뉴 올리언스 스타일 음악을 변함없이 연주했다 .

1950 년대 들어 집집마다 한 대씩 갖게 된 TV 시대로 접어들어서도

방송에 적극 출연하면서 미국 문화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 .

루이 암스트롱이 등장하기 전까지 재즈는 뉴 올리언스 지방을 중심으로 연주되던 음악에 지나지 않았다 .

지금처럼 매스 커뮤니케이션 (Mass Communication)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에

사람들은 주거지를 벗어난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제대로 알 수도 없었고 ,

즉각 반응할 수도 없었다 .

뉴 올리언스에서 태어나 재즈를 배우고 미시시피 강을 거슬러 시카고로 이주해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다 뉴욕으로 새롭게 둥지를 틀고 다시 LA ,

유럽으로 종횡무진하면서 재즈를 전파한 루이 암스트롱의 발자취는

초기 재즈가 미국 남부 미시시피 델타를 중심으로 연주되던 지역

음악에서 북미 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대중 음악으로 변모하는 과정과 일치한다 .

재즈의 발상지 뉴 올리언스의 스타일을 기반으로 한 번 들으면 좀처럼 잊기 힘든

우렁차고 시원한 트럼펫 연주와 빡빡하게 돌아가는 빅 밴드 연주에서도

자신의 파트를 맡아 즉흥 솔로 연주를 들려주는 탄탄한 실력 ,

트럼펫 못지 않은 걸걸한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와 관객들과 끊임없이

재잘재잘대면서 소통하는 자세까지 ...

 

루이 암스트롱은 익명 또는 무명의 존재로 다소곳이 자리잡고 앉아

악보에 적힌 대로 음악을 연주하는 무채색 느낌의 재즈 뮤지션들로 가득 찬 배경을 찢고 나와서

그만의 독특한 캐릭터와 낙관적인 모습과 즐거움을 주는 음악으로 재즈를

대중이 즐길 수 있는 총천연색 엔터테인먼트로 확장시킨 장본인이다 .

루이 암스트롱이란 거인과 만나면서 ,

루이 암스트롱이라는 음악인을 통해서 재즈는 전국구를 아우르는

대표적인 음악 장르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

로큰롤 (Rock'n'Roll)에서 엘비스 프레슬리 (Elvis Presley),

(Rock)에서 비틀스 (The Beatles)가 한 역할을

재즈에서 루이 암스트롱이 했던 것이다 .

그리고 재즈 음악에 대한 관심과 호응이 팽창하면서 활동 무대도 점점 넓어져

그의 음악은 라디오의 전파를 타고 전국 방방곡곡에 널리 알려졌고

음반과 영화를 통해 전 세계에 그 이름을 떨치면서

이후의 어떤 재즈 음악가도 이루지 못한 부와 명성을 누렸다.

------------------------------------------------------------------------------------------

 

루이 왕의 땅이라는 뜻의 루이지애나의 항구도시 뉴올리언즈는

새로운 오를레앙이라는 이름이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프랑스 이민자들의 도시다 .

이곳에 남부 농장으로 팔려갈 흑인 노예들이 들어오면서 흑인 인구의 비중이 급격히 늘어났고

자연스럽게 프랑스의 혈통과 흑인의 피가 섞이게 되었다 .

크리올이라 불린 이들은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나 악사로 생계를 꾸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이 재즈 음악 역사의 첫 장을 열게 되었다 .

이 세상에서의 삶이 말할 수 없이 고달팠던 흑인들은 노예 시절부터

늘 조물주의 부르심을 받아 요단강을 건너가는 그 순간을 기다리며 살았다 .

그러니 장례식이 다른 어떤 의식들보다 중요할 수밖에 없었고

그로 말미암아 그들 나름의 독특하고 성대한 장례식 문화가 자리잡게 되었다 .

그런 장례식의 볼거리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밴드를 앞세운 장례식 행렬로 ,

뉴올리언즈를 배경으로 한 헐리우드 영화에도 자주 등장한다 .

 

흑인들의 장례 행렬을 이끄는 밴드라면 당시 흑인들의 교회음악인 흑인영가를 연주했다 .

악보도 없을뿐더러 그것을 읽을 줄도 모르는 그들 사이에서는

트럼펫보다 좀 더 크고 부드러운 소리가 나는 코넷이 먼저 첫 소절을 연주하면

나머지 악기들이 적당히 알아서 따라가는 것이 나름의 방식이었다 .

그런데 무더운 날씨에 묘지까지 이어지는 긴 장례식 행렬의 앞에 서서

무거운 악기를 연주하며 걸어가야 하는 악사들에게

느리고 단조로운 음악을 되풀이하는 일은 참으로 고역이었을 것이다 .

그러던 중에 아마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축 처지는

음악의 리듬을 살짝 비틀고 밋밋한 가락에도 곁가지를 솜씨 있게 덧붙이면서

처음과는 전혀 다른 흥겨운 음악으로 탈바꿈했을 것이고

그것이 사람들의 호응을 얻으면서 점점 더 많이 ,

또 널리 퍼져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

---------------------------------------------------------------------------------------------------------

우리나라에 알려진 건 1971 년 사망한 후 18 년이 지난 1989 년이었다 .

1987 6 월 항쟁과 민주화 이후 다양한 분야에서 문화가 개방되었다 .

노동자와 서민의 스트레스를 달래는 술자리 단골 메뉴인 소주의 자리에

그동안 상류층이 마시는 술로 인식되었던 맥주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

OB 맥주와 하이트 맥주로 양분되어 경쟁하던 맥주 시장에 1989 년 출시된

OB 수퍼 드라이는 "고발효 드라이 공법으로 강한 첫맛 ! 깨끗한 끝맛 !" 을 강조하면서

당시 최고 인기 만화가 이현세를 모델로 찍은 CF 를 공중파에 마구 뿌려댔다 .

끝없이 펼쳐진 밀밭을 배경으로 80 년대 남자들의 로망 , 지프차를 몰고

드라이브를 하면서 맥주 한 잔을 마시는 (음주 운전 따위는 신경 쓰지 말자 )

수퍼 드라이 CF 는 수염을 잔뜩 기른 이현세의 느끼한 멘트 "OB 가 좋습니다 . OB 수퍼드라이 "

초등학교 친구들끼리 따라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

여기에 배경 음악으로 흐르는 음악이 바로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 였다 .

OB 수퍼드라이 광고가 히트를 친 후에 라디오 방송에서

CF 배경 음악을 틀어 달라는 리퀘스트가 늘기 시작했다 .

 

 

재즈 뮤지션이 아니라 대중 가수로 루이 암스트롱이 남긴

가장 유명한 히트곡이 바로 What A Wonderful World 였다 .

노예 제도의 잔재가 강하게 남아 있던 남부 루이지애나에서

흑인으로 태어나 미혼모 가정에서 자라 유명인이 되었지만

평생 흑인이 당하는 고통과 억압 , 부당한 대접을 몸소 견디면서 살았던

루이 암스트롱이 말년인 67 살 노래한 "이 아름다운 세상 "

역설적으로 아름답지 않은 세상을 서로의 사랑으로 보듬으면서

아름답게 만들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

  ​

베트남 전쟁이 파국으로 치닫던 1967 년 발표된 노래여서

참담한 현실을 바라보는 노 () 음악인의 담담한 자세마저 엿볼 수 있다 .

우리나라에도 로빈 윌리암스 (Robin Williams) 주연 1987 년 영화 "굿 모닝 베트남 (Good Morning Vietnam)"

삽입곡으로 사용되면서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다 .

아름다운 멜로디와 루이 암스트롱의 목소리에 어우러진 (?) 베트남 전쟁의 참혹한 장면이 오버랩되면서

지금봐도 소름이 끼치는 반전 (反戰 ) 명장면으로 꼽힌다 .

 

찰리 파커나 마일스 데이비스가 재즈라는 장르의 영역을 혁신하고 흐름을 뒤바꾼 뮤지션이라면 ,

루이 암스트롱은 재즈에서 시작해서 대중 음악과 대중 문화의 영역에 재즈를 담아 널리 퍼뜨린 일을 해냈다 .

루이 암스트롱이라는 인물이 가진 독특한 캐릭터와 성격 ,

음악 스타일이 재즈의 인상 (印象 )과 성격을 규정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