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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우상이었던 헤밍웨이

by 하니번잡 2019. 7. 6.

그의 동생이 쓴 "나의형 헤밍웨이"라는 책과

헤밍웨이의 장단편들을 모조리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그 내용들이 가물가물 하지만

그 독서들은 제가 인생을 대하는 태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독서는 그 구절 구절들을 다 기억하는것이 아니라

글을 읽고 느끼는 감정이 내게 남아 그것이

삶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가가 중요한것 같습니다.

 

어느 기자분이 참 고 퀄리티의 기사를 쓰셔서

읽고 다시 헤밍웨이에 대한 기억이 살아닜습니다.

 

 

헤밍웨이의 [킬리만자로의 눈]은 죽음에 대한 짧은 서사시다.

[킬리만자로의 눈]은 시작부터 몽환적이다.

(해리)는 아프리카 정글 한가운데서 죽어가고 있다.

영양의 사진을 찍으려다 가시나무에 다리를 긁혔는데

소독약으로 치료를 하지 않은 것이 화근이 됐다.

방치한 탓에 상처 부위가 악화됐고,

결국은 다리에 괴저가 발생했다.

썩어가는 다리를 잘라내는 수술을 하기 위해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소설가였다.

파리에서 돈 많은 부인을 만나 결혼했다.

하지만 안일함은 그에게서 일에 대한 의욕을 빼앗았다.

더는 무엇도 쓸 수 없다고 느꼈을 즈음

그는 변화를 주기 위해 아내와 함께 아프리카로 왔다가 낭패를 당했다.

다리의 고통과 공포감이 사라지고 피로가 몰려오면서

그는 죽음이 다가왔음을 직감한다.

죽음에 대해 두려움도 더는 없다.

최고의 글을 쓸 때까지 쓰지 않고 간직해온 글도

이제는 쓰지 않기로 했다.

 

머릿속에는 과거의 일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불가리아에서, 파리에서, 이스탄불에서 그가 겪은 많은 무용담들이다.

언젠가는 글을 쓰겠다며 남겨뒀지만 차마 쓰지 못했던 소재들이다.

모든 것을 포기했건만 작가로서는 쓰지 못한 글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다.

파리 뒷골목인 콩트레스카르프 광장에 대한 기억은 생생하다.

그곳에는 술주정뱅이가 많았다.

사람들은 지독한 가난을 잊기 위해서는 언제나 싸구려 와인에 취해있었다.

해리의 가정부 마리는 하루 8시간만 일하도록 한 노동계 때문에

주정뱅이 천국이 됐다고 생각했다.

남편이 6시까지 일을 하게 되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간단히 한 잔 정도 할 테니 돈도 과히 낭비되지 않을 거예요.

그렇지만 5시에 일이 끝난다면

매일 밤 취하게 되니 돈이 남아날 리 없어요.

노동시간 단축으로 골탕먹는 사람은 노동자의 부인들뿐이라니까요

가정부 마리의 불만은 헤밍웨이가 살던 당시 부녀자들의 실제 불만이었다.

[킬리만자로의 눈]1936년 집필됐다.

높이 19710피트. 아프리카 대륙의 최고봉.

서쪽 봉우리의 명칭은 마사이어로 신의 집이라는 뜻의 누가예 누가이’.

이곳에 얼어붙은 한 마리의 표범 시체가 있다.

도대체 그 높은 곳에서 표범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표범이 여기까지 오려면 열대우림에서 황무지를 지나 올라와야 한다.

표범은 왜 굳이 거기까지 갔을까.

소설은 말한다. ‘아무도 그 이유를 설명해 주는 사람은 없다고....................

[킬리만자로의 표범]

헤밍웨이가 두 번째 부인 폴린 파이퍼와 결혼했을 때 쓴 소설이다.

그녀는 재력가의 딸로 헤밍웨이의 삶은 전례없이 풍족했다.

배경과 등장인물만 놓고 본다면 이 소설은 그의 자전적 소설에 가깝다.

헤밍웨이는 중위로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기자로서 제2차 세계대전을 체험했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시대를 냉철하게 관찰한 후 이를 원고지에 남겼다

 

어네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1899-1961)

의 결혼 생활

 

어네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1899-1961)라고 하면

누구나 제일 먼저 그의 대표작으로 "노인과 바다"를 생각합니다.

"노인과 바다",

"무기여 잘 있거라",

"해는 다시 떠오른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등등

그의 유명한 작품들은 영화로 나왔고

그는 1953년에 "노인과 바다"로 퓰리처 상(Pulitzer Prize for Fiction)을 받았고

1954년에는 노벨문학상(Nobel Prize in Literature)을 받은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입니다.

그러나 그의 사생활은 네번의 결혼,

세번의 이혼, 그리고도 많은 여성편력, 등등

결코 평범하지 않았고

끝내는 엽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극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헤들리 리차드슨 (Elizabeth Hadley Richardson, 1891-1979)
Ernest_Hadley_and_Bumby_Hemingway

헤들리 리차드슨(Elizabeth Hadley Richardson, 1891-1979)

 

"The Paris Wife"라는 2011년에 출간된

폴라당시로는 노처녀로 여겨진 28세의 보수적이고

전 근대적인 헤들리 리차드슨(Elizabeth Hadley Richardson, 1891-1979)

세계 제 1차 대전 때 이태리의 북부 전선에서 기자로 참여하였다가

부상을 입고 고향에 돌아와 방황하며 갈등하며 신문기자로,

새내기 작가로 야망에 불 타 있던 8살이나 연하의

20세의 헤밍웨이를 시카고에서 만나 사랑에 빠져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21년에 결혼을 하고

신혼의 단꿈을 가지고 파리에 가서 작가의 아내로 내조하며

함께 여행하며 많은 사람들과 교제하며 겪는

여러가지 결혼생활의 이야기들을

헤들리의 입장에서 소설처럼 쓴 책이지만

모든 자료를 통하여 사실에 입각하여 쓰여진 책이었습니다. 매클레인(Paula McLain)의 장편소설

 

이 책을 통하여 세계 제 1차 대전 후의

파리의 생활상을 알 수 있었는데

헤밍웨이는 세계대전 후 1920년 대의 혼란스러운 파리에서

"잃어버린 세대 Lost Generation"의 당대의 문학가들인

"위대한 갯츠비, The Great Gatsby"의 저자 스콧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 등과

교제를 통하여 큰 영향을 받으면서

아내 헤들리의 헌신적인 내조로

작가로서 발돋음을 하기 시작하면서도

전쟁터에서 부상을 입었던 충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방황하며 방탕한 생활을 즐기다가

결국은 아내 헤들리와 친한 친구였던 폴린 파이퍼(Pauline Pfeiffer)를사귀게 됩니다.

헤밍웨이와 이혼 후 헤들리는 파리에서

Chicago Daily News의 기자인 Paul Mowrer를 만나 사귀다가

아들 범비와 자신에 대한 따뜻한 보살핌으로

결국 1933년에 결혼을 하여 시카고에 와서 살며

헤들리 이후에도 두번이나 이혼하며 세명의 아내와 결혼을 하면서

미국의 최고의 작가로 떠 오르는 것을 멀리서 지켜보며

헤밍웨이보다 더 오래 살았습니다.

헤들리는 네번째 아내 메리 웰시한테서

헤밍웨이의 자살 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가 아침 일찍 일어나 가장 좋아하던 빨간색 가운을 걸치고

가장 아끼던 총을 들어 나가서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방아쇠를 당겼다는 자살 소식을 듣고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던 것은

이미 그에게 그러한 요소가 다분히 있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헤들리와 살던 때에 헤들리를 위해서 쓴 헤밍웨이의 첫번째 소설,

"해는 또 다시 떠오른다 The Sun Also Rises"의 로열티를

헤들리는 이혼한 후에도 계속적으로 받았고

이 소설이 영화로 나왔을 때(1957)도 그 이익금을 받았다고 합니다.

폴린 파이퍼(1895-1951)

폴린 파이퍼(1895-1951)는 아이오와 출신으로

저널리즘을 전공하고 신문사와 잡지사에 근무하다

파리의 Vogue 잡지사에 근무하기 위해

파리에 와서 헤들리와 헤밍웨이와 친해지게 됩니다.

그들은 여행을 할 때도 폴린과 같이 가기도 했는데

결국 헤밍웨이가 폴린과 사귀는 것을 알게 된 헤들리는

자기보다 훨씬 현대적이고 매력적이었던

친구 폴린에 대해 갈등하며 괴로워하면서도

가정을 지키려고 애를 쓰지만

결국 그들은 이혼을 하게 되고 (1927 1)

부유하고 캐톨릭이었던 폴린과 결혼을 하기 위해

헤밍웨이는 개종을 하였고

같은 해 5월에 결혼을 하고

다음 해(1928)에 키 웨스트에 와서 살게 됩니다.

헤밍웨이는 외적으로는 낚시도 잘하고

아프리카에서 맹수 사냥을 즐기며 술을 엄청 많이 마셔대는

가장 남자다운 면을 보였지만

헤들리에 의하면 내적으로는 심히 연약하고

불을 끄고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불안해 하는 성격이었고

죽음을 두려워해서 무척 고민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연상의 여자들을 좋아했는지

첫번째 아내 헤들리는 8살이나 연상이었고

폴린은 4살 연상이었습니다.

플로리다의 키 웨스트(907 Whitehead Street)에 있는

헤밍웨이가 살던 집은 아담한 이층집으로

뒤편에는 별채가 있고 수영장과 정원이 잘 가꾸어져 있습니다.

이 집은 폴린의 부유한 삼촌(Gus Pfeiffer)

1931년에 결혼 선물로 사 주었다고 합니다.

1930년대 말에 헤밍웨이는 이 집에 2만불을 들여서 수영장을 만들었는데

그 당시의 2만불은 지금 싯가로는 25만불이 넘는 금액이라고 합니다.

이 집에 살면서 그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킬리만자로의 눈" 등을 집필하였는데

 

폴린은 이혼을 한 후에 1951년에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 둘 사이에는 두 아들이 있고...

 

Martha Gellhorn(1908-1998)

헤밍웨이는 스페인 내란을 취재하기 위해서 함께 갔던

Collier's Weekly의 기자 Martha Gellhorn(1908-1998)을 사귀게 되어서

폴린과도 1940년에 이혼을 하고

3주 뒤에 겔호른과 세번째의 결혼을 하였습니다.

세번째 아내 마르다 겔호른과는 쿠바에서 지냈고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집필하였습니다.

메리 웰시

네번째 아내 메리 웰시와는 쿠바와 아이다호에서 지냈고

이 때 "노인과 바다" 등을 쓰고 엽총으로 자살하였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헤밍웨이는 아내와 이혼할 때마다 명작을 발표했다고 합니다.

첫번재 아내인 해들리 리처드슨과 살 때 "해는 또 다시 떠오른다"(1926),

두번째 아내 폴린 파이퍼 때, "무기여 잘 있거라"(1929),

세번째 아내 마르타 겔호른 때,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1940),

네번째 아내 메리 웰시와 결혼 후, "노인과 바다"(1951),

이렇게 아내가 바뀔때마다 걸작을 내 놓았습니다.

"The Paris Wife"의 작가는 이 책을 통하여

첫번째 아내와 살던 시절의 헤밍웨이가

그래도 가장 순수하고 인간적이었고

당시에는 화려하고 당당하고 오만한 파리의 여인들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빅토리아 시대의 전 근대적인 여성상을 지녔던

헤들리와의 시절이 비록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은 세대로

격변하는 시대에 살면서 오늘날 미국의 가장 훌륭한 작가로 기억되고 있지만

엽총자살로 삶을 마감할 수 밖에 없었던

헤밍웨이의 일생 중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말년의 작품, "노인과 바다"에서 보여주듯 인생이,

그리고 인생의 모든 목표가 참으로 허무한 것임을 새삼 깨닫게 하는 헤밍웨이의 일생...

 

어니스트 밀러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

미국의 근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20세기 최고의 소설가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 lost one)의 기둥이자 대표작가

미국의 참전용사, 종군기자 그리고 대문호.

어니스트 밀러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는

셰익스피어와 함께 영문학을 대표하는 인물로

그 유명한 노인과 바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의 저자다.

영문학을 넘어 세계 문학 역사상 허무주의하면 빠질 수 없는 작가이기도 하다.

같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윌리엄 포크너와 함께

미국이 크나큰 자부심을 가지고 자랑하는 작가이다.

잃어버린 세대의 등장 이후,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로,

유럽은 문학의 주도권을 사실상 미국에 넘겨준 거나 다름 없게 되어버렸다.

헤밍웨이는 잃어버린 세대 작가들 중 대표 3인방

어니스트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드,

윌리엄 포크너 중

가장 중요한 대표 인물이기도 하다.

 

의 작품에는 대체로 극기주의, 허무주의, 하드보일드 스타일과

강인한 남성상 등이 잘 표현되어 있다.

미국 문학사에서 19세기 미국 최고의 작가로

마크 트웨인과 허먼 멜빌이 꼽힌다면,

20세기에는 헤밍웨이가 꼽힌다.

 

의사인 아버지와 예술을 사랑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어렸을 때 어머니의 강요로 자주 여장을 당하고,

여장한 상태에서 지인들을 만나는 일을 경험했다.

이 때문인지는 모르나 어머니와는 평생 사이가 나빴다.

헤밍웨이의 생일에 어머니가 그에게 선물을 소포로 보냈는데,

열어보니 그 안에는 권총(그것도 아버지가 자살할 때 썼던 것)이

들어있었다는 일화도 있다.

사실 헤밍웨이는 아버지 쪽을 완전히 닮았다고 볼 수 있었다.

사냥꾼/모험가 기질이었으나 쇠락한 아버지와

잔소리 많은 전직 음악가 어머니는 서로 종종 싸웠고,

헤밍웨이는 위의 언급처럼 강인한 남자의 표본인 아버지를 따랐다.

헤밍웨이는 쇠락했지만 남자다우며 똑똑한

아버지를 평생 존경하였고 자신의 롤모델로 삼았다.

가정의 주도권은 어머니가 가지고 있었고,

아버지는 낚시, 사냥 등을 하며 집 밖을 배회하였다.

어머니는 여성이 참정권도 없던 시절에도

당당하고 진취적인 여성이었기 때문에,

조용한 성격의 초라한 아버지와 대조되는

어머니의 모습은 더욱 부각되었다.

헤밍웨이와 어머니의 악연은 어머니가 죽는 날까지 이어진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 헤밍웨이는 곧바로 달려갔지만,

《노인과 바다》를 쓸 무렵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난 글을 마저 써야 한다.

돈을 부치면 가족들이 알아서 할 거다." 라는 식으로 가볍게 무시.

어릴 적 사진. 보시다시피 여아용 옷을 입고 있다.

이 사진을 볼 때마다 헤밍웨이는 무척 짜증냈다고 한다.

처음 사회생활을 기자로 시작해 종군기자로도 활약했고,

1차대전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으며 무훈을 세웠다.

이때의 경험은 이후 그의 작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무기여 잘 있거라》 등등에서 발현된다.

 

((​For Whom The Bell Tolls 미국의 메탈 밴드 메탈리카가

이 작품을 바탕으로 곡을 만들기도 했으며,

2집 Ride the Lightning에 수록되었다.))

메탈리카/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For Whom The Bell Tolls

 

Make his fight on the hill in the early day
Constant chill deep inside
Shouting gun, on they run through the endless grey
On they fight, for they're right, yes, but who's to say?
For a hill, men would kill, why? They do not know
Stiffened wounds test their pride
Men of five, still alive through the raging glow
Gone insane from the pain that they surely know

그 고지에서 싸웠던 기억은
가슴깊이 차갑게 자리잡았네.
끝없이 펼쳐진 잿빛 포연 속을 달리며 울리는 총성.
그들의 싸움은, 정의를 위한, 그래, 그러나 누가 말해주리?
그들은 왜 그 언덕위에서 죽어가야 하는가? 아무도 모르지.
부상당한 군인들은 그들의 자부심을 시험받고
몇명의 군인들만 무섭게 타오르는 화염속에 아직 살아있네.
결국 참을수 없는 고통에 미쳐버리겠지만.

For whom the bell tolls
Time marches on
For whom the bell tolls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시간은 흘러가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Take a look to the sky just before you die
It's the last time he will
Blackened roar, massive roar, fills the crumbling sky
Shattered goal fills his soul with a ruthless cry
Stranger now, are his eyes, to this mystery
He hears the silence so loud
Crack of dawn, all is gone except the will to be
Now they see what will be, blinded eyes to see

자, 죽기 전에 하늘을 보게나
이것이 마지막 일 것이네.
어둡고 무거운 포효는 하늘로 산산이 흩어져 버리고
깨져버린 목표는 허망한 흐느낌으로 그의 마음을 채우리.
그의 눈에는 너무나 이상한 모습들.
그는 너무나 큰 침묵의 소리를 듣네.

새벽은 끝나고 그의 영혼만 남긴채 모든게 끝나겠지,
자, 이제 보지 못하는 눈으로 무엇이 될것인지 보라,


For whom the bell tolls
Time marches on
For whom the bell tolls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시간은 흘러가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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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신문사의 특파원 자격으로 1차대전 이후의 파리에 체류하며,

스콧 피츠제럴드, 거트루드 스타인, 에즈라 파운드 등등의

미국작가들과 교류하며 문학적 소양을 키워갔다.

거트루드 스타인은, 무명이지만 능력 있는 예술가들을 지원해 준 사람이다.

이 후원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파블로 피카소도 있었고,

이 인연 덕분에 피카소는 헤밍웨이와 지인이 된다.

참고로 남동생 리오 스타인은 시인 겸 평론가.

이들처럼 파리에 체류하며,

파리의 풍요한 예술적 토양과 자유를 즐기면서 산 문학가 집단들을

문학계에선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라 칭하며,

이 표현을 최초로 쓴 사람은 앞서 얘기한 거트루드 스타인이다.

이들이 1차 세계대전을 겪은 충격으로

자신들이 구세대에게 버려진 잃어버린 중간 세대라고 느끼면서,

이전 세대와 단절된 새로운 문학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파리의 프랑스인 지성인들은,

전후 풍요를 구가하는 미국에서 보내주는

넘치는 달러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파리와 프랑스 문화에 열렬히 환호하는 척 하지만,

실제론 프랑스어도 배우지 않고 겉핥기로

껍데기 문화만 섭취하는 이들을 경멸했다고 한다.

스페인 내전(1937)

강아지를 든 군인이 죠지 오웰

옆에 담배 손가락에 낀 사람은 어니스트 헤밍웨이

 

쉽게 말해 고급쓰레기. 헤밍웨이는 물론 그들의 퇴폐적인 위선을 증오했으며,

자신도 자신의 마초적인 성향 때문인지,

이 당시 '계집애 같이'(?) 예쁘장하고

퇴폐적인 문화에 탐닉한 자신의 젊은 시절을 흑역사로 여겼다.

 

헤밍웨이가 첫 번째 부인인 해들리와 함께 파리 생활을 돌이키며 썼던 회상록을,

4번째 부인인 메리 헤밍웨이(본명은 메리 웰시)가 헤밍웨이 사후 출판한

《이동 축제일(Movable Feast)》에서 '잃어버린 세대'의 유래가 나온다.

거트루드 스타인은 자신의 차를 고치려고 정비소에 맡겼는데,

젊은 직원이 빨리 고치지 못하자 정비소 사장이

"너희들은 전부 '허탕 치는 세대'야." 라고 호통 쳤다.

거트루드는 이를 나중에 헤밍웨이에게 그대로 전하면서 덧붙였다.

"자네도 그래. 자네는 물론… 전쟁을 겪은 모든 젊은이들이 그렇다고.

이 잃어버린 세대들아." lost에는 '길을 잃은' 뜻만이 아니라

'타락한'이란 뜻도 있다는 걸 감안하면,

이 타락한/인생 헛산 세대들아! 라는

일갈이 위에서 설명한 상황에 더 적절하다.

이후 앞에서 언급한 《무기여 잘 있거라》로 큰 명성을 얻은 뒤,

당시 혁명 스페인의 공화제를 열렬히 지지하여

종군특파원으로 자진해 스페인으로 갔고,

혁명군과 함께 보수파 프랑코의 군대를 비판했다.

이때의 경험으로 그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쓰게 된다.

국내서는 헤밍웨이가 스페인에서 총 한 방 안 쏘고

도시에서 아무런 일 없이 노닥거리다 판타지로 가득한

글줄을 뽑았다는 식의 이야기가 간혹 떠도는데,

애초에 헤밍웨이는 종군기자였다.

그리고 그는 1차 세계대전의 참전 용사였던만큼 그런 비겁자도 아니었다.

헤밍웨이가 스페인 내전에서 총을 안 쐈다는 이야기는,

당대에 "헤밍웨이가 스페인 내전에서 열렬하게 싸웠다"는

과장된 신화가 퍼지고 그게 헤밍웨이의 명성에 일조했다 정도에 불과하다.

 

《노인과 바다》, 《킬리만자로의 눈》 도 했는데,

이때 만난 국민당 장군들에 대해 '솔직하고 직설적이고

총명하고 말재주가 좋다' 라고 좋은 평가를 했다.

참고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이어진 파리해방전투에도 참여했다.

이렇게 열정적인 마초의 호칭은 우리말로 "아부지"에 해당하는 '파파'였다.

본인도 그렇게 불러주길 원했고. (1899년생이니 노르망디면 40대 중반이다.

당시는 징병제시대였으므로 병사들은 대부분 20대 초.)

그리고 노인이 되면서 늙어 약해지는 자신을 싫어하게 되었다.

1차대전 당시 저승가기 직전 부상을 당한 것을 시작으로,

말년의 비행기 사고로 크게 다쳐서 그 후유증이 커졌다고.

그 때문에 더욱 사냥 같은 취미에 몰두하다

급기야 정신착란까지 일으키게 된다.

결국 7월 2일 이른 아침,

그는 자신에게 헌신적이었던 아내가 자게 놔둔 채,

엽총을 입에 물고 쏴 자살해 생을 마감한다.

하지만, 늘그막에 작품이 지지부진한 점으로도 고민해 온 점도

자살 원인으로 꼽기도 한다.

죽기 전 몇 달 동안 글을 쓰다가 계속 찢고 쓰던 걸 던지고…

술을 마시며 괴로워했고,

6월 28일, 자살을 시도하다가 실패했는데,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젠 써지지 않는다! 써지질 않아!"

 

그는 평생 인생을 격렬하고 폭력적으로 진정한 마초로 살았다.

그는 6피트(183cm)가 넘는 거구였으며 항상 끓어오르는 정열을 주체하지 못해,

사냥, 복싱 등 위험하고 강렬한 스포츠를 즐기고,

싸움도 꽤 잘했다는 등 자신의 강인함을 세상에 자랑하고 다녔다.

하지만 막상 정식 복싱 대결을 붙여주자 슬그머니 도망갔다고 언급한 지인도 있다.

1943년에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가

샘 우드(1883~1949)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는데,

시사회에서 영화화 수준에 불만을 품고

감독을 주먹으로 패서 코뼈를 부러뜨렸다(...)는 일화를 싣고 있다.

 

일화로는 이 영화 여주인공을 맡은 잉그리드 버그만이

나중에 헤밍웨이를 만나 이 영화보셨냐고 질문했는데

헤밍웨이는 "극장에서 6번 봤지."라고 대답했다.

버그만이 그만큼 재미있었나요? 라고 하자

"아니야, 보다가 마음에 안들어서 포기하고

마저 보느라고 다시 보고 그렇게 해서

6번을 본 끝에 겨우 다 봤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영화가 미국에서만 제작비

3.5배가 넘는 가까운 흥행을 거둬들이며

그럭저럭 흥행에 성공하자 헤밍웨이는 더 언짢아했다고 한다.

((심지어 일제 강점기 조선에도 "헤밍웨이가 사람 팼다"는 기사가

동아일보에 실린 적이 있는데 피해자는 미국의 시인이자 평론가였던

맥스 이스트먼(Max Forrester Eastman, 1883 ~ 1969)과

배우(기사에서는 법률가로 나와 있다) 에드워드 채프먼(Edward Chapman, 1901 ~ 1977).

둘 다 헤밍웨이의 가슴털을 보고 놀린 게 화근이었다(...).

이스트먼은 헤밍웨이더러 "자네 가슴털은 진짜 털인가 아니면 붙인 건가?"라고,

채프먼은 "완고한 자식마냥 가슴털 하고는"하고

헤밍웨이의 얼굴을 건드리자 격분해서 턱을 날려버렸다나..

출처: 동아일보 1939년 4월 2일 기사 ))

 

 

이 자신을 자기를 세상에 과시하는 것도 매우 즐겼으며,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유명 연예인같이

자신의 화려한 사생활을 노출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하루가 멀다 하고 유명 인사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했다고 한다.

자살한 이유들 중 하나가 자신이 늙어

세상의 관심이 멀어지는 걸 견디지 못했던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여러 차례 결혼과 이혼을 반복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엘리자베스 해들리 리처드슨(1891~1979) - 1921~27년까지 결혼.

여담인데 그녀는 1922년에 파리의 기차역에서

헤밍웨이의 원고가 담긴 여행 가방을 분실한 일이 있었다.

이 원고는 90년이 넘도록 행방을 알 수 없어서 이걸 다룬 소설도 여럿 나왔다.

다이앤 길버트 매드슨이 쓰고 국내에서도

정발된 《잃어버린 헤밍웨이를 찾아서》도 이걸 다룬 소설이다.


폴린 파이퍼(1895~1951) - 1927~40년.


마사 겔혼(1908~1998) - 1940~45년. 2012년 HBO에서

이 두 사람을 소재로 한 TV영화를 만들었다.

제목은 《헤밍웨이와 겔혼(Hemingway & Gellhorn)》.

클라이브 오웬이 헤밍웨이를,

니콜 키드먼이 겔혼을 연기했다.

드라마의 평은 썩 좋은 편은 아니다.


메리 웰시 헤밍웨이(1908~1986) - 1946~61년까지

가장 오래 같이 살았으며 그의 장례식도 그녀가 치렀다.

 

위의 셋은 헤밍웨이의 주체할 수 없는 막장행보에 질렸거나

그와 마찬가지로 막장으로 놀다 떠나갔고,

마지막 아내인 메리가 헤밍웨이와 금슬이 좋았다고 한다.

그가 자살했다는 소식이 전 세계에 퍼졌을 때,

모스크바와 바티칸 시국에서도 그의 죽음에 유감을 표명했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가 전해진다.

모델이자 영화배우였던 손녀 마고 헤밍웨이(1954-1996)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헤밍웨이의 말년은 전술(前述)했듯 글쓰기에 대한 집착과

정신착란 등에 시달리다가 자살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헤밍웨이는 자신이 도청과 계속되는 감시를 받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주변에서는 헤밍웨이를 정신이상자로 몰아갔다.

그러나 훗날 존 에드거 후버가 어째서인지

1940년대의 FBI 감시대상목록에 헤밍웨이가 있었다고 시인하면서,

헤밍웨이의 주장은 사실로 밝혀졌다.

 

후버 이자식 .. 미국 예술가들을 많이 괴롭혔다.

공산주의자로 몰아서...

헤밍웨이의 문체는 하드보일드 스타일(Hard-Boiled Style) 이라고 부른다.

이 문체는 잡다한 수식이 없고 간결하다.

또한 제3자의 시각으로 사실만 무덤덤하게 나열한다.

위 예시처럼 주인공과 사랑을 나누던 사람의 죽음마저 차갑게 묘사한다.

인물들의 감정묘사를 거의 하지 않으며,

인물들의 행동과 복장을 통해 간접적으로 묘사한다.

헤밍웨이 같은 거물급 작가가 왜 이렇게 화려한 수식어구 없이

간결하고 쉬운 문체로 작품을 썼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지만,

문체가 쉽다 하더라도 그 문체가 담고 있는

작품의 분위기나 내용의 깊이, 작가의 의도 등이 상당히 깊다.

Jean Patchett and Ernest Hemingway

그의 신문기자 생활을 통해 간결하고 정확한 문체에 익숙했고,

당시 유행하던 하드보일드 대중소설들(대실 해밋이나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 등)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그 자신의 마초적인 성격과도 부합했다.

 

이런 이유로 영문학을 처음 접하는 사람,

혹은 영문학도들이 가장 선호하는 작가로 꼽힌다.

문장이 간결하고 평이한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영어실력이 대단하지 않아도 쉽게 읽힌다.

포크너 같은 난해하고 복잡한 작품을 읽다가

헤밍웨이를 펴면 무슨 초등학교 영어교과서를 보는 듯한 느낌이

'아주 잠깐' 든다.

실제로 포크너는 헤밍웨이의 책에서 어려운 단어는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고 했고,

헤밍웨이는 어려운 단어를 써야만 감동이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하며,

단순한 단어와 절제된 묘사만으로도 감동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읽기 쉬운 글은 가장 쓰기 어렵다" 라는 너새니얼 호손의 말대로,

헤밍웨이는 스스로 《무기여 잘 있거라》의 첫 부분을

적어도 50번은 고쳐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무기여 잘 있거라》의 마지막 부분도 17번이나 고쳐썼다.

특히 그런 헤밍웨이의 특징이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있는 6단어 소설인데,

친구들이 단어 6개로 자신들을 울릴 만한 소설을 써 보라고

장난삼아 내기를 걸자 즉석에서 지어 낸 것이다.

비록 6단어로 이루어진 문장 하나에 불과하지만,

이 안에는 그 자리에 있었던 친구들을 울려버릴 만한 많은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

 

본문 내용은 '사용한 적 없는 아기 신발 팝니다.'가 된다.

아기 신발을 사용한 적이 없다는 뜻은 아이가 유산 혹은 사산되었거나

걸음마를 떼기도 전에 요절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도 모자라 이걸 팔아야 할 만큼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6단어 소설을 정말 헤밍웨이가 썼는지는 이견이 있다.

 

이러한 문체 때문인지 일부 평론가들은 헤밍웨이의 진가는

장편이 아닌 중·단편소설에 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헤밍웨이의 장편은 비판하면서

단편에는 격찬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

관심이 간다면 인디언 부락, 깨끗하고 불이 환한 곳, 살인자들,

킬리만자로의 눈 등의 소설들을 한 번 읽어보자.

단편이라지만 손바닥소설 급으로 짧은 소설들도 아주 많다.

 

모히또 칵테일과 고양이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헤밍웨이는 30여 마리의 고양이를 키웠으며,

이들의 후손은 헤밍웨이의 사후 기념관이 된 자택에서 여전히 거주하고 있다.

생전 기른 고양이 중에 다지증 고양이가 있어서,

다지증 고양이를 헤밍웨이 고양이라고 하게 되었다.

 

거장 사진작가 유서프 카쉬가 그의 사진을 찍기 위해

해밍웨이를 방문했을 때는 점심도 되지 않은 시각이었다.

카쉬는 해밍웨이가 사진을 찍지 않겠다고 할까봐

해밍웨이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를 만나자마자

술을 좋아하는 걸로 알려진 해밍웨이에게 대접하기 위해

독주를 주문했는데 그걸 본 해밍웨이가 이 시간부터라고

굉장히 당황하여 카쉬도 덩달아 당황했다는 일화가 있다.

결국 그날 사진촬영은 잘 진행됐다고.

hemingway_castro

뜬금없지만 피델 카스트로가 쿠바 혁명을 일으킨 이후로

소련에서도 대단한 인기인이 되었다.

혁명가도 아닌 해밍웨이가 왜 인기인이 되었냐면

당시 소련에 몰아닥친 쿠바 열풍 때문에

1960년 2월 쿠바를 방문했던 아나스타스 미코얀이

공식 일정에도 없는 해밍웨이 방문 의사를 타진할 정도였다.

거기에 쿠바로 가는 내내 해밍웨이 소설을 읽으면서 보냈다고.

 

헤밍웨이의 마초성은 그가 종군기자로써 활동한

1944년 6월의 노르망디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났는데,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일어나기 전 5월 25일 밤의

런던에서는 등화관제 탓에 아무것도 안 보이는 완벽한

어둠 상태에서 차를 몰다가 물탱크를 들이받는 사고를 내지 않나,

이로 인해 뇌진탕에 걸려 병원에서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할 상황에서

이 작전에 빠질 수 없다며 나흘 만에 병원을 몰래 탈출하질 않나,

자신이 동행 취재하는 소대가 제일 먼저 상륙해

제일 먼저 노르망디에 발을 딛는 부대가 되어야 한다고 부추겨

해당 소대를 지휘하는 소대장을 곤란하게 만들었고,

총을 소지 불가능한 종군기자의 위치에 있었음에도

멋대로 무기를 챙겨 독일군 여럿을 잡는 비범한 짓거리도 했다.

이 외에도 상당히 정신나간 짓거리를 여럿 하였으나,

가장 압권은 건물 내에서 포격받는 와중,

다른 사람들은 전부 납작 웅크려 포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만 포격받는 와중에도 건물 내부를 돌아다녀서

다른 사람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던 사례일 것이다.

이 언급된 사례 외에도 사고를 자주 쳐서 사람 여럿 골때리게 만들었다고.

그의 어록


정말 재미있는 책을 쓰려면 수많은 강타를 맞아봐야 한다.

(punishment는 권투에서 "강펀치"를 뜻하기도 한다)

- 1981년, 카를로스 베이커가 편집하고 헤밍웨이가 자비로 출판(…)한

《1917~1961년에 엄선된 편지들》 중 1924년 12월 6일에 썼던 "편지"에서.

위에서 봤겠지만 헤밍웨이는 다른 작가들이 탁자 앞에 앉아서

토론이니 뭐니 하며 시간을 까먹자,

권투 글러브 끼고 체육관으로 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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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있는 좋은 부분들이란 작가가 운 좋게 주워듣거나

(( 《노인과 바다》는 정말로 주워들은 걸 토대로 썼다고 한다.))

그의 일생 동안 실패한 것들뿐이다. 그래도 전자는 후자만큼 귀중하다.

-위에서 언급한 같은 책 중 1929년 9월 4일에 스콧 피츠제럴드에게 썼던 편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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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을, 전쟁은 그 곳에 항상 있었지만 우리는 더 이상 그 곳으로 가지 못한다.
- 1927년, 《여자 없는 남자들》 중 《다른 나라에서》에서.

헤밍웨이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여한 전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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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ld breaks everyone and afterward many are strong at the broken places.

But those that will not break it kills.

It kills the very good and the very gentle and the very brave impartially.

If you are none of these you can be sure it will kill you too but there will be no special hurry.
해석: 세상은 모두를 파괴하고, 그 자리에서 사람들은 강해진다.

그러나 세상은 부러지지 않는 사람들을 죽인다.

아주 선하거나, 상냥하거나, 용감한 이들을 세상은 무자비하게 죽이고 만다.

만약 당신이 그렇지 않아도 죽이겠지만, 딱히 서두르지는 않을 것이다.

- 1929년, 《무기여 잘 있거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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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미국의 현대문학은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으로부터 나온다.

미국식 글쓰기도 그것으로부터 나왔다.

그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그 후로도 없었다.

- 1935년, 《아프리카의 푸른 언덕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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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이길 수 있다면 어디서나 이길 수 있다.

세상은 괜찮은 곳이자 싸울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며, 여길 떠나는 게 무척 싫다.
오늘은 수많은 날들 중 그저 하루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다른 날들에 벌어지는 일은 네가 오늘 뭘 하냐에 달려 있다.

올해 내내 그랬다. 너무 많이 그랬다. 모든 전쟁도 그런 식이다.

- 1940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태양은 또 다시 떠오른다.

태양이 저녁이 되면 석양이 물든 지평선으로 지지만

아침이 되면 다시 떠오른다.

태양은 결코 이 세상을 어둠이 지배하도록 놔두지 않는다.

태양이 있는 한, 절망하지 않아도 된다.

- 1926년,《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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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패배하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사람은 파괴될 수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다.

- 1952년, 《노인과 바다》에서.

 

우리 모두는 그 누구도 '거장'이 될 수 없는 길드에 속한 실습생들이다.

- 1961년 7월 11일, 《뉴욕 저널-아메리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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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파리의 지붕 위에 서서 내다보며 생각했다.

"걱정하지 마라. 넌 예전에도 항상 썼었고, 지금에도 쓸 수 있다.

네가 해야 되는 것은 진실한 글을 쓰는 것뿐이다. 네가 아는 가장 진실한 글을 써라."

- 1964년, 《이동 축제일》(몇째 주 무슨 요일 하는 식으로 날짜가 정해지지 않은 축제일.

좋은 예로 부활절이 있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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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운은 스스로 만들렴, 지그. 무엇이 훌륭한 패배자를 만드는지 아니? 연습이야.
- 1976년, 헤밍웨이의 딸인 글로리아 헤밍웨이가 쓴

《파파의 개인적인 언행록》에서 글로리아가 어렸을 적에 들은 말.

 

그대가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배워야 한다는 건 그들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대가 그걸 위해 태어났음을 그들이 생각하게 하라.
- 1984년, 아놀드 새뮤얼슨이 쓴 《헤밍웨이와 함께》에서 헤밍웨이가 작가 생활

2년차일 때 그 동안 쓴 원고가 전부 담긴 가방을 잃어버린 일에 대해 언급할 때.

문학 좆까. (Fuck literature.) (...)

- 1924년, 에즈라 파운드에게의 편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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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남자로서의 자부심이 강했던것 같다.

But man is not made for defeat.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