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다오
한국과 가장 가까운 거리의 외국 도시로서
비행기로 한 시간이면 도착하는 해외 여행지..
한국 사람으로서는 가장 여행하기 쉽고
편리하다.
기후와 먹거리가 매우 한국사람에게 적당하고
이국적인 멋이 있는도시다.
청도의 역사
청도는 그 아름다움 만큼이나
역사가 드라마틱히다.
칭다오(중국어 간체: 青岛,
Qīngdǎo, 청도)는
중화인민공화국 산둥 성의 부성급시이며,
산둥 반도 남부에 위치하는 산업 도시,
관광도시, 군항이다.
산둥성에 위치하지만,
산둥성의 지휘를 받지 않으며,
중앙정부의 지휘를 받는다.
그만큼 경제적으로나,
정치,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뜻이다.
면적은 1만1026km2,
인구 9백만명 정도이다.
이 지역의 이름을 딴
칭다오 맥주와 라오 산(崂山)의
깨끗한 광천수로 유명한 도시이고
중국에서 네 번째로 큰 항구 도시로서,
지방 정부와 동등한 경제권을 가지고 있다.
해양성 기후의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다.
연평균 기온은 12℃이고,
연평균 강수량은 776㎜이다.
비교적 사계절이 뚜렷하며,
여행하기에 좋은 계절은 봄과 가을이다.
청도는 역사,문화의 도시이고
중국 도교의 기원지이다.
중국 도교는 중요한 종교이므로 다음에
자세하게 포스팅 해 보려 한다.
6000년 전에 청도에서는
이미 인류가 생존하고 번식한 자취가 있었고 한다.
(이러한 내용들은 칭다오 박물관에 가면
실감나게 잘 설명되어 있다.
청도의 역사관이라고도 할 수 있다)
동주 시기 당시 산동 지역의 제2대읍인 즉묵이 건립됐다.
(즉묵은 청도의 약간 내륙쪽에 위치해 있으며
청도가 도시로서 발전하기전, 아직
해안의 작은 한 마을 이었을때, 즉묵은
도시급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즉묵은 청도시에 속해있는
작은 부속도시이다.)
진시황이 중국을 전국적 통일 한 다음에
청도 교남시에 위치하는 랑아대를 셋 번이나 유람했다.
(교남에는 랑아대가 실제로 존재하며,
관광지로 유명하다.)
진나라 때 서복이 선대를 통솔하고
랑아대에서부터 한국과 일본으로 출항한 적이 있다.
한무제는 지금의 청도시 성양구에 위치하는 부기산에서
신선을 제사한 적이 있고 또 교주만 가에 있는
여고산에서 하늘과 조상을 제사하고
명당(옛날 국왕이 성대한 의식을 행하던 궁전) 9 개를 설립했다.
랑야타이(랑아대)
청대 말년,청도는 이미 번화한
소도시로 발전되고 교오라고 불렸다.
역사적으로 산둥 반도의 항구는 북부에 집중했다.
1891년6월14일(청 광서 17년),
청정부가 교오에서 방어진을 치고
그때는 청도시 성립의 시작이었다.
예전에는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이 곳에
청 정부는 군사를 파견하여
청도를 개발하기 시작했고
군사시설이 건설되면서 발전이 시작되었다.
1897년11월,독일은 거야교안을 핑계로 하여
청도를 군대로 점령했다.
청일 전쟁 후, 삼국 간섭으로
중국에 은혜를 베풀었던 독일은
1897년 칭다오 일대를 조차하면서
산둥 반도 일대를 세력하에 두었다.
독일은 칭다오를 극동의 근거지로 삼았고,
산둥 반도 일대를 독일의 세력 아래 두었다.
1898년 독일에 의해 개항된 이후
급속도의 성장을 이루었고,
그 영향으로 도시가 마치 작은 독일에 온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이 이유 때문에 '중국 속의 유럽'이라는 애칭도 갖고 있다.
칭다오에 남아 있는 서양풍의 건물이나
칭다오 맥주는 당시 독일이 남기고 간 유산이다
1914년에 제1세계전쟁이 일어나고
11월에 일본이 독일을 대체하여
청도를 점령하고 식민통치하게 되었다.
1919년에는 중국근대사에서 아주 유명한
오사운동이 일어났다.
"청도를 되찾아오자"는 구호로 한 운동이다.
칭다오의 오사운동 휏불탑은
이 운동을 기념하는 상징탑이다.
1922년12월10일에 중국은 청도를 되찾아오고
북양정부에 속하는 교오상부독판공서를 설립했다.
1929년7월에 청도특별시가 설립되고
1930년에 청도시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1938년1월에 일본이 다시 청도를 강점했다.
1945년9월에 국민당 정부가 청도를 받아들이고
계속 특별시로 정했다.
독일이 세운 칭다오 성당/ 더 크게 지으려고 설계 했으나, 히틀러가
예산을깍아 지금 크기로 지었다는 일화가 있다.
국민당 정부에 의해 회복되었으나,
곧 미국의 해군 기지가 되었다.
1949년6월2일에 청도가 해방되었다.
1986년에 청도시는 국가 계획에서 단열을 실행되고
성급인 경제관리권을 가지게 되었다.
1994년에 전국15개 부성급 도시의 하나로 정해졌다.
시내 곳곳에서 독일식, 스페인식, 일본식 등으로
지어진 건축물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이는 청도의 과거 식민지 역사를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중국 속의 유럽'이라는 애칭도 갖고 있다.
유럽문화가 중국문화와 접목되어 어우러지는 풍광
청도의 서쪽 해안선은 구불구불하고 경사가 유연하다.
잔교의 사나운 파도,
소청도의 백색 등탑,
노신공원의 조용한 흑 송림,
해수욕장의 넓은 모래사장,
그리고 각기 자체의 특색이 있는 바닷가의 건축물 등은
자연과 인간이 융합된 아름다운 경관을 형성하고 있다.
청도의 10대 관광 명소 중 이곳이 7-8정도 차지하며
특히 잔교를 바라보거나 잔교에서 주변의 경치를
구경하는 것을 나타내는 몇 가지의 말이 있다.
멀리서 날아갈 듯한 회란각을 바라보거나
회란각을 휘감고 도는 물결을 바라보는 비각회란(飛閣回瀾),
회란각에서 물소리를 듣는 비각청조(飛閣聽潮),
잔교에 걸린 긴 무지개를 보는 장홍원인(長虹遠引),
잔교에 뜬 달을 보는 잔교야월(棧橋夜月) 등이 그것이다.
잔교 : 이 부두는 1892년 등주진총병(登州鎭總兵) 장고원(章高元)이
청도에 진주하면서 건설한 것이다.
군용물자를 실어 나르고 북양해군(北洋海軍)의 선박을
정박하기 위해 지은 이 부두는 총명아문(總兵衙門)이
있던 서남해안에 건설되었다.
필요한 건축자재는 이홍장(李鴻章)이 북양해군의
도원(道員)이었던 공조서(龔照嶼)에게 명령을 내려
북양해군의 여순수리창(旅順修理廠)에서 남는
철강재를 가져오도록 하였다.
1894년 2번째로 청도에 시찰을 왔던 이홍장은
잔교의 완공을 보고 극구 칭찬을 하면서
광서제에게 주청하여 ‘철부두(鐵埠頭)’라는
이름을 내리도록 했다.
그 후로 잔교는 ‘해군잔교(海軍棧橋)’,
‘전해잔교’, ‘해군철부두’라는 이름을 얻었다.
30년대에는 청도를 찾는 사람들에게서 ‘청도십경’
가운데 하나로 손꼽혔으며, 청도부근의 24경
가운데 하나로 이름을 날렸다.
수많은 문인과 묵객들이 시부를 지어 잔교의
아름다움을 칭송했으며, 관광객들이 비교적 많이 찾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다른 관광지와 달리
입장료를 받지 않는 것도 특이하다.
2008년 올림픽공정으로서 청도시 정부는
전 해안선 기획건설을 2002년의
12대 사업의 하나로 선정 하였다.
청도시 정부는 2002년부터 시작하여 단계별로
해변 보행도로를 건설하였는데,
계획에 따라 해변가 서쪽의 단도 환로에서
동쪽의 석로인 공원에 이르기까지
바닷가를 따라 보행도로를 건설,
전체 길이가 약36.9킬로미터에 달한다.
해변가 보행도로는 해변의 절경을 따라
아름다운 풍광을 만끽 하도록 여러 개의 유명한
풍경구역을 유기적으로 연결시켜서
한 폭의 완전한 풍경화를 보는 듯 하다.
해변 보행도로의 건설은 최 첨단의 해변 보행도로
설계 기술을 도입하였으며 동시에 해변가의 풍광을
손색 없이 나타내고 관광자원의 재개발을 실현하였다.
보행도로를 걸으면서 섬 도시 전 해안선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노라면
전 해안선의 아름다운 풍경에 도취 되어
모든 생각을 잃는다.
청도 제1해수욕장의 백사장은 넓고,
암초와 소용돌이가 없으며
백사장의 길이는 약 580미터이며,
상어방지그물장치수면 넓이가380여 미터에 달한다.
성수기에는 매일 25-30만 명이 여기서 해수욕을 즐기며
최고로 하루 연인원 35만 명에 도달한 적도 있다.
제1해수욕장을 국제수준에 도달시키기
위하여 청도시 기획국에서는 전 세계에 공정 설계안을
모집 하였으며 산을 잘 나타내고 바다와 연결
주변시설이 완벽하게 인간 친화적인 현대화한
설계기술을 채용, 제1해수욕장에 대한 대규모
개발을 진행하였다.
새롭게 개조된 "제1해수욕장"의 면적은
원래의 1.9헥타아르에서 3.6헥타아르로 증가되었고
1,2층의 탈의실은 넓고 쾌적해 졌으며 샤워는
600개에서 900여 개로 증설 되었다.
임시 탈의실은 천막식 구조를 채용하여서 제작,
이 역시 해수욕장의 자랑이다.
해수욕장에는 구조 감독 시스템과 방송, 라이트,
배경음악 시스템을 설치하였는데 감시제어범위가
전체 구역을 커버하여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의 안전을 확보하고 있다.
이는 청도의 또 하나의 관광, 휴가,
여가와 헬스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최적 풍경구이다.
"도시응접실"로 불리우는 신회천광장은
2004년 7월에 이미 준공되여 사용 되었다.
완전히 새롭게 단장된 회천광장에 가면
전체 광장의 웅대한 스케일, 현대적이고 낭만적이며
정교하고 매력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된다.
45헥타아르의 여가, 운동장소는 도시 이미지를
강화하였으며 도시기능을 완벽화 하였다.
매일 시민과 관광객들이 신 회천광장에 와서
관광하거나 여가를 즐기고 있다.
그들은 광장의 푸른 나무 와 꽃 사이를 거닐며
음악의 선율이 흐르고 있는 분수 밑에서 게임을 하며 새로
건설된 축구장과 테니스장에서 운동을 하며
신회천광장이 가져다 주는 재미와 상쾌함을 즐긴다.
청도시 시구의 동쪽에로의 확장과 더불어 풍경구의 동부는
근 몇 년 사이에 아주 많은 발전을 가져왔으며 현대화한
새 도시 구역과 해변가의 풍경이 결합된
새로운 풍경구를 형성하였는데 동해로와
홍콩로가 그중의 대표이다.
이 두 갈래의 풍경도로는 기능과 주제에 따라
여러 단지로 나뉘었으며 매 단지구역에는
녹지를 건설하였고 광장과 주제 조각이 있으며
부지 면적이 10만 평방미터인 5.4광장은 큰 나무,
잔디와 꽃으로 둘려 싸여 있다.
주제조각은 5월의 풍경에 하나의 연소하는
횃불로 이루어 졌는데 청도의 발랄하고
끊임없는 발전을 상징하고 있다.
8대관 풍경구는 아름다운 해변가 풍경구인 동시에
24개 국가의 200여가지 풍격의 건축물이 집중되어 있으며
이렇게 보존이 완전한 다국적 건축군은 현재 청도 이외에는 없으며
만국 건축박람관으로 불리우고 있다.
청도에서 사업과 생활을 하였던
유명한 문화 명인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한 백화원 청도 문화 명인 조각원(백화원이라고도 함),
제1고전 원림인 소어산,
새로 열린 주민 활동광장8대협 공원,
대형 축제활동을 진행하는 회천광장 등은
모두 청도 관광시가 볼만한 아름다운 곳들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청도시의 도시건설과 발전은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 왔으며 해변가 풍경구의
여러가지 시설도 끊임없이 완공 되고 있으며
관광 자문, 가이드, 쇼핑, 숙식, 교통 등
서비스 기능이 한층 좋아지고 있다.
청도 해변 풍경구는 교주만 양측의
연해 해변가 일대가 주체이며 골든 해안 관광코스가 중점이고
청도만풍경구,
회천만풍경구,
태평산풍경구,
8대관풍경구,
동부 신시구와
석로인 국가관광 리조구 구역
등 6개 부분을
포함한 시구내의 각 관광 풍경구
풍경구역의 개발을 계속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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