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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베이징여행 중국 베이징 살때 자주 가보았던 이화원 - 이화원과 서태후

by 하니번잡 2019. 7. 7.

때로는 말입니다..

역사적인 유물이나, 장소에 갈때 그 역사를 알면

더욱더 그 재미와 즐거움이 크다는 것 입니다.

중국역사의 아이러니와 소설같은 이야기 

 

이화원과 서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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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이후로는

절대 여자가

권력을 잡지

못하게 하라는

유언을 하고 죽은 서태후

그 서태후의 이야기를 해 보려한다.

요즘 시끄러운 정치판을 보고

문득 떠오른 이야기..

만수산( 萬 壽 山 , 완서우산)쿤밍호를 조성할 때 파낸 흙을 쌓아 만든 인공산

 

중국 북경에 몇년간 거주하면서

자주 갔던 이화원.

그 이화원에 가면 항상 떠오르는

인물 서태후...

중국의 북양함대 군자금을 빼돌려

이화원을 치장하고,

그로 인해 광서제가 일으켰던

청일전쟁에서

북양함대의 대패로 중국이 ​

​종이 호랑이로 만방에 알려지고,

광서제의 몰락을 내심 바랐던 서태후

그 서태후의 사치스러운

여름별장 이화원은

오늘날 세계문화 유산으로

관광객들을 모으고 있다.

히틀러의 아우투반이 그렇듯이

이 역사의 아이러니는

세계 곳곳에서 역사를 되돌아 보게한다.

요즘 시끄러운 한국의 모습도

먼 훗날 뒤돌아 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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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의 이화원.. 어느 석양무렵 찾았던 이화원에서 촬영

이화원은

중국 베이징()에서

서북쪽으로 10km 떨어진

교외에 위치한 중국 황실의 여름 별궁이자

최대 규모의 황실 정원.

총면적이 2.9k㎡에 이르며

자연 풍경을 그대로 이용한 정원에

인공 건축물이 환상적인 조화를 이룬

중국 조경 예술의 걸작품으로

199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화원은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서북쪽으로 10km 떨어진 교외에 위치한 중국 황실의 여름 별궁이자 최대 규모의 황실 정원. 총면적이 2.9k㎡에 이르며 자연 풍경을 그대로 이용한 정원에 인공 건축물이 환상적인 조화를 이룬 중국 조경 예술의 걸작품으로 199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금나라 때인 12세기 초에 처음 조성되어,

1750년 청나라 건륭제() 때 대폭 확장되었다.

당시에는 칭이위안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1860년 서구 열강의 침공으로 파괴되었다.

 

이후 서태후(西)가 실권을 쥐고 있던

1886년 재건되면서 이허위안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주로 이곳에서 수렴청정을 했던 서태후는

일시적인 피서와 요양 목적으로 건설되었던 이허위안에

각종 전각과 사원을 추가해

본격적인 국사를 볼 수 있는

궁전 형태로 변모시켰다.

긴 회랑들 입구에서 부터 이어지는 이 회랑에는 ​그림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이허위안 재건비용 때문에 청나라가

1894년 청·일전쟁에서 패배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막대한 자금을 들였다고 전해진다.

이허위안에는 거대한 인공호수와

60m 높이의 인공산을 중심으로 각

종 전각(殿)과 사원, 회랑 등 3000여 칸의

전통 건축물이 자리잡고 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총면적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거대한 인공호수 곤명호(, 쿤밍호)다.

 

호수라기보다는 바다처럼 광활하기 때문에

당시의 기술로 인공으로 만들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항저우()에 있는 서호(西)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각 건물로 이어지는 회랑들

쿤밍호 북쪽에 있는 약 60m 높이의

만수산(, 완서우산)은 쿤밍호를 조성할 때

파낸 흙을 쌓아 만든 인공산이다.

건축물들은 모두 산의 남쪽 기슭을 따라 배치되어 있다.

산 정상에 있는 불당 지혜해(, 즈후이하이)는

드넓은 쿤밍호를 비롯한 이허위안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바로 아래 21m 높이로 우뚝 솟아 있는 6각형의 불전

푸시앙가오는 이허위안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물로 꼽힌다.

이외에도 서태후가 정사를 보았다는 런서우디엔,

홀로 휴식을 취했던 곳으로 중국 최대의 경극극장이 있는

덕화원(, 더허위안),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져 있는

배운전(殿, 파이윈디엔) 등이 유명하다.



이허위안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건축물은 창랑(),

즉 긴 복도다.

길이가 778m, 273칸으로

중국에서 가장 크고 긴 복도이며,

천장과 벽에 수많은 그림이 그려져 있어

‘중국 최대의 야외 미술관’으로 불린다.

쿤밍호에 떠 있는 듯한 돌배( 石 舟 ),

이외에도 중국의 안녕을 기원하며 만들었다는
쿤밍호에 떠 있는 듯한 돌배(石舟),
여러 개의 돌 다리,
아름답게 조각된 수많은 석상들을 볼 수 있다.


​서태후 .. 중국 정치사의 아이러니..


서태후의 권력 장악

1856년, 제2차 아편전쟁이 발발했다.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애로호 사건과
가톨릭 신부 처형 사건을 구실로
중국을 침략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들의 목적은 중국에서의
권한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1860년, 영국·프랑스 연합군은 북경을 침입하여
동양에서 제일 호화로운 궁전인
원명원(圓明園)에 불을 질렀다.

이에 함풍제는 공친왕 혁흔(奕訢)을
연합군에 보내어 굴욕적인
‘북경 조약’을 체결하게 했다.


함풍제가 황제로 있던 10년간은
참으로 다사다난한 세월이었다.
나라 안에서는 태평천국의 난과
염군(捻軍)의 난이 일어났고,
나라 밖에서는 영국과 프랑스가
무력으로 이익을 챙겼으며,
러시아는 중국 동북에 있는
1백만 평방킬로미터의
드넓은 땅을 빼앗아 갔으며 심지어는
만주제국의 발상지까지도 가만 놔두지 않았다.
종실의 입장에서는
아이훈 조약만한 치욕이 없었다.

호화스런 건물들 .. 이것을 만들던 사람들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



겹치는 내우외환으로 근심하던 함풍제는
중병이 들어 일어나지 못했다.
1861년 7월, 혼수 상태에서 깨어난
함풍제는 얼마 살지 못할 것을 알고
후사를 고민했다.

의귀비(懿貴妃, 이후의 서태후(西太后))는
권세욕이 아주 강한 여자인 데 반해,
황후 유호록씨(鈕祜錄氏, 이후의 동태후(東太后))는
주관이 없는 여자였다.

함풍제는 자신이 죽은 다음에 황궁 여인들이
정권을 장악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린 황제를 보필하는 책임을
협판대학사 겸 상서인 숙순(肅順)과 이친왕(怡親王)
재원(載垣), 정친왕(鄭親王) 단화(端華) 등 8명의
대신들에게 맡겼다.

함풍제는 설령 공친왕이 의귀비를 돕는다 해도
8명의 대신들이 합심하면 그녀의 야망을
쉽사리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함풍제는 ‘어상(御賞)’과 ‘동도당(同道堂)’이라는
인장 두 개를 남겨놓는 실수를 저질렀고,
이는 황궁 여인들이 수렴청정을 할 수 있는 화근이 되었다.


입구쪽으로 보인다.


​ 

‘수렴청정’이란 태후나 황후가 발(염(簾))을 내리고
그 뒤에서 국사를 본 것에서 유래한 말이다.
‘어상’은 함풍제가 황후 유호록씨에게 하사한
개인 인장이고
‘동도당’은 외아들 재순(載淳)에게 하사한 개인 인장이다.
이 두 인장은 비록 개인 인장이지만 황권을 상징하고 있었다.
함풍제의 뜻은 분명해 보였다.
이 두 인장으로 8명의 대신들을 제어하라는 것이었다.


회랑의 ​고색찬연한 색채들





그런데 얼마 후 어리석은 8명의 대신들이
의귀비에게 유리한 주청을 했다.
황후 유호록씨를 자안황태후(慈安皇太后)로 모시고
의귀비 나랍씨(那拉氏)를 자희황태후(慈禧皇太后)로
모시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황태후가 된 서태후는
권력욕이 더욱 강해졌으며
암암리에 정변을 준비했다.

이후 서태후와 공친왕 혁흔은
열하(熱河)의 피서산장(避暑山莊)에서
함풍제를 조상하는 기회에 숙순을 체포했으며,
같은 날 자금성에서 나머지 7명의 보정대신을 체포했다.

함풍제가 임명한 양찬정무대신(襄贊政務大臣),
즉 8명의 대신들 중에서 5명은 신강으로 귀양을 갔고,
​재원과 단화는 자결할 것을 명받고 자진했으며,
숙순은 사형을 당했다.

이를 역사상에서는 ‘신유정변(辛酉政變)’이라 하며,
나랍씨는 신유정변을 통해 중국의 최고 통치자가 되었다.
그때 그녀의 나이가 스물일곱 살이었다.

중국의 옜 건물은 황금색 지붕이 많다.




무술정변이 실패한 후
청나라 조정은 더욱 부패가 만연했다.
1900년에는 영국, 미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오스트리아 등의 8개국 연합군이
중국 북경까지 쳐들어왔다.

7월 19일 밤, 점점 가까워지는 포성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서태후는
양심전(養心殿)에 앉아서
수시로 올라오는 급보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재의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와
“큰일났습니다. 서양인들이 쳐들어옵니다.” 하고 외쳤다.

이어서 군기대신 영록이 황급히 들어와,
러시아 카자크 기병이 천단으로
쳐들어왔다고 보고했는데,
천단은 북경 외성의 지척에 있었다.

이에 대경실색한 서태후는 대신들과 함께
북경을 떠나 몽진할 일을 급히 상의했다.
7월 21일 새벽, 변복을 한 서태후와 광서제
그리고 황실 사람들은 마차에 올라
황급히 북경성을 빠져나갔다.

그때 동직문과 제화문은 이미 연합군이 점령했기 때문에
서태후 일행은 경산을 거쳐 지안문
서쪽 길로 빠져나와 서쪽으로 도망쳤다.
그들이 덕승문에 이르자 난민들이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서태후의 오빠 계상이 8기군에게 명해
난민들을 막은 후에야 비로소 길을 열고 나갈 수가 있었다.

이화원에서 바라본 북경시내





수많은 인마를 거느린 서태후 일행은
오전에 이화원에 도착했다.
동서 양궁의 사람들이 인수전에 들어가
잠깐 휴식을 취하려고 하는데 지금 당장 출발하라는
서태후의 명이 떨어졌다.

황실 사람과 호송 인원 1천여 명으로 구성된
이 방대한 피난 대오는 황망히 서쪽을 향해 떠났다
몽진 길에서 서태후 일행은 고생이 막심했다.
먼지가 이는 흙바닥에서 이불도 없이 새우잠을 자야 했고,
여러 날 동안 갈아입지 못한 옷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났다.

그러니 고기는커녕 좁쌀 죽으로 끼니를 때우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들은 서안까지 가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서
안에 이르러 안전과 의식주가 보장되자
여태까지 풀이 죽어 있던 서태후는
다시 기가 살아나 위엄을 차리기 시작했으며
하루 빨리 북경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다.
그래서 경친왕 혁광(奕劻)에게 명해
북경으로 가서, 직예총독 이홍광과 함께
연합군과 강화 교섭을 하게 했다.

비록 서안으로 도망쳐 온 서태후이지만
그녀의 사치와 탐욕은 여전했으며,
지방 관리들에게 많은 진상품을 요구했다.
서태후 일행이 물 쓰듯 쓰는 경비를 대기 위해
각 성에서는 돈을 올려보내야 했고,
원래 운하로 운송되던 조량(漕糧)은
길을 바꾸어 한구(漢口)로 해서 한수,
단강을 거쳐 서안으로 운반되어 왔다.
문헌에 따르면 광서 27년 2월 초까지
서안으로 운반된 돈은 5백만 냥이며,
양식은 1백만 섬이나 되었다고 한다.


호수에 설치된 다리..​ ​



서태후는 의식주가 극도로 사치스러웠다.
그녀의 일일 생활비는 약 백은 4만 냥이나 되었고
1년 생활비는 북양 함대 건설비보다 많았다.
이화원을 보수하고 환갑 잔치를 차릴 때가
바로 중일갑오전쟁(中日甲午戰爭) 직전이었다.
나라의 국고는 국방 건설에 사용되지 못하고
서태후를 비롯한 통치자들에 의하여 탕진되었다.

나라가 그 지경에 이르렀어도
서태후가 먹는 어선(御膳)은 여전히
진수성찬에 없는 것이 없었다.
고기 요리를 만드는 훈국(葷局),
채소 요리를 만드는 소국(素局),
밥을 짓는 반국(飯局),
차를 끓이는 차국(茶局),
떡과 과자 등을 만드는 점심국(點心局) 등이
여전히 설치되어 있었다.

각 국은 태감이 전문적으로 관리했으며
그 밑에는 수십 명의 요리사들이 있었다.
그리고 서태후의 어선을 장만하는 일은
총관대신인 계록이 총관했는데,
매일 1백여 가지의 요리를 만들어
바치느라 하루에 은 2백 냥이 들었다.

서태후는 서양 열강들로부터 강화를 얻어내기 위해
여러 번 상유(上諭)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이번 중국의 변란은 조정의 뜻이 아니라
우연적으로 발생한 일이지만
우방들에게 피해를 줘서 미안하며,
청나라 조정은 이번 변란을 일으킨 자들을
모조리 숙청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 상유는 갖은 방법으로 열강들의 환심을 사려는
서태후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서태후는 열강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광서제의 명의로 ‘죄기조’를 내렸으며
거기에는 “중국의 재물로 외국의 환심을 사겠다.”는 말까지 있다.
나라의 재물을 바쳐서라도 외국과 화의하겠다는 말이니
침략자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말이 어디 있겠는가?

이화원에 설치된 건물들은 화려함의 극치





1901년 8월 15일, ‘신축조약(辛丑條約, 베이징 의정서)’이
체결되었으며 중국은 전쟁 배상금으로
은 4억 5천만 냥을 내놓기로 했다.
이는 청나라 조정의 12년 수입과 맞먹는 액수였다.
‘신축 조약’의 체결은 중국이 반식민지,
반봉건사회로 완전히 전락했음을 상징한다.

외국 침략자들과의 ‘화의’가 달성되자
서태후 일행은 8월 24일에 북경으로 돌아왔다.
북경에서 도망칠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길 양쪽에 초롱을 줄지어 내걸고
백성들은 숨을 죽이고 땅에 엎드려서 환송을 했다.

팔인 대교(大轎)에 앉은 서태후의 앞에서는
어전 대신들과 시위들이 길을 열었고
그 뒤에서는 북경 난의위(鑾儀衛)의
범절로 열을 선 수만의 인마와
3천 대가 넘는 마차가 뒤따라왔다.
마차에 실은 것은 서태후와 왕공 대신들의
행장과 뇌물들이었다.
그들의 대열은 마치 큰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것처럼 기세 등등했다.

11월 28일에 서태후와 광서제가 돌아오자,
경성의 관리들은 많은 인력과 재력을 허비하여
어도(御道)를 새로 닦고 그들을 맞이했다.
그러나 북경성 안의 분위기는 말이 아니었다.
거리에서는 8개국 연합군 병사들만 떠들썩거리며
그들을 바라볼 뿐, 그들 일행을 맞이하는
관리와 백성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외국 침략자들의 약탈을 겪은 북경성은
쓸쓸하기만 했다.


클링더는 북경 거리에서 중국 의화단을
마음대로 총살하는 만행을 저질러 백성들의 분노를 샀다.
나중에 청나라군에게 사살되었다


​한 사람을 위한 이러한 행위는 이해하기 힘들다.

1898.9 무술정변을 일으켜
광서제를 유폐시키고 다시 수렴청정을 하다
서태후는 광서제가 1898년 6월부터
캉유웨이(강유위)의 의견을 수용하여
일으킨 일련의 개혁운동을 배은망덕이라고 여겼다.

광서제를 황제로 만든 것은 서태후 자신이었다.
황제로 만들어주고 친자식에게도 허용하지 않았던
친정까지 허락하였더니 믿는 도끼도 못 되는 것이
발등을 찍는다고 서태후는 생각했다.
그러나 광서제는 너무 허약한 도끼였다.

그는 서태후의 발등을 찍기는커녕
자신의 발등을 내려찍고 말았다.
서태후와 보수파를 제거하기 위해
위안스카이(원세개)의 군사력을
움직이려 했던 광서제는 배신당했다.
위안스카이는 황제의 계획을 그대로
서태후에게 고해바쳤다.

기회를 노리던 서태후는 1898년 9월 광서제를
자금성의 영대에 유폐시키고,
변법자강을 주도하던 개혁파를
검거하는 무술정변(무술년에 일어났다
하여 무술정변이다)을 일으켰다.
그리고 정치 일선에
다시 나서 청나라를 쥐고 흔들었다.

젊은시절의 서태후라 한다.​

 

아름다운 자태, 불타는 야망

19세기 말, 서태후는 황제는 아니었지만,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며,
나라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였다.
20세기도 아니고 19세기에,
거기다 남성중심의 유교국가 중국에서
여성이 47년 간 통치자였다는 사실은
서태후가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매우 탁월한 인물이었음을 말해준다.

서태후가 집권할 당시 청나라는
대내외적으로 복잡한 상황에 처해있었다.
외적으로는 서구열강이 호시탐탐
중국 땅을 노렸고 내적으로는
250여 년 간 만주족의 지배를 받던 한족들이
여기저기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면서
일어나고 있었다.

어쩌면 중국역사상 가장 위태롭고
혼란스러운 시기였을지도 모를
19세기 말, 최고 권력을 가졌던
서태후의 행보가 이후 중국의 운명을
일부 결정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효흠현황후, 자희태후라고도 불리는 서태후는
1835년 안휘성의 몰락한 관리의 딸로 태어났다.
만주족이었고 성은 예흐나라,
어렸을 때 이름은
행정 혹은 행아였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서태후의 어린 시절은 매우 빈곤해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애인 영록을 버리면서 까지 궁녀가 되고 싶어 했다.

1851년 16세에 궁녀가 되어
자금성에 들어간 서태후는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욕심 많고 진취적이었던 서태후는
궁녀 이상의 그 무엇을 원했다.
젊음과 미모가 있었고
거기에 더해 묘하게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말솜씨가 있었던 서태후는 함풍제 주변 환관들의
환심을 샀고 곧이어 황제의 눈에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황제의 유일한 혈육을 낳았다.
아들이었다.
이것은 하늘이 그녀에게 준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서태후는 일개 궁녀에서 일약 귀비로 뛰어 올랐다.
서태후는 이 지점에서 더 큰 야망을 꿈꾸기 시작했다.
귀비가 되어 황제의 옆에 있다 보니
나라의 정사가 하나하나 눈에 들어온 것이다.


곳곳에 설치된 누각들 .. 얼마나 음주가무를 즐겼을까?



그저 황제의 후궁으로,
황태자의 모후로 얌전히 사는 것에
만족하지 못했던 서태후는
때때로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함풍제는 그녀의 마음에 담긴 야망을 알아차리고
이를 무척 경계하였다.

유일한 혈육의 어머니인 서태후가
훗날 폭주할 것을 두려워한 함풍제는
그녀를 죽일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860년 서구 열강의 북경 침범과
피난 과정에서 함풍제는 31세에 요절하고 만다.
유일한 후계자인 황태자의 어머니 서태후.
그녀의 6살 난 아들이 동치제로 황제가 되자
서태후는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마침내 그녀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동치제

 

수렴청정은 함풍제의 정비인 동태후와 같이 했지만,
그다지 정치에 관심이 없고 문맹이었던 동태후는
서태후에게 정치전반을 맡겼다.

이때 서태후는 비로소 ‘서태후’ 라는 명칭을 얻게 된다.
황제의 궁을 가운데 두고
동태후와 서태후의 거처가 동쪽과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수렴청정 초기 서태후는 황족인 공친왕과 연대하여
청나라의 자강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제도와 인사 개혁을 통해 한족들에게도 기회를 주었고
태평천국의 난도 완전히 진압하는 등
부국 자강운동은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루었다.
후세에서는 이시기를 동치중흥이라고 하기도 한다.

동치제를 허수아비로 두고
발 뒤에서 실제로 중국을 다스렸던 서태후였지만
그녀의 권력에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었다.
그녀가 중국을 다스릴 수 있도록 만들어준
고맙고도 고마운 존재,
바로 아들 동치제가
언젠가는 반드시 권력을 빼앗아갈 정적이기 때문이다.


유람선 .. 이 호수는 바다처럼 물살(일종의 급류: 다리부근에서 경험)이 있다. ​



자신의 권력은 황제가 성장하여
친정을 하게 되면내주어야만 했다.
아들의 성장을 대견스러워 해야 할 어머니로서는
절대 가져서는 안될 생각이
서태후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권력욕 앞에서는 아들이든 아니든
다 자란 황제는 무조건 눈의 가시였던 것이다.
게다가 동치제는 생모인 자신보다
후덕한 동태후를 더 따랐고
황후도 동태후의 가문에서 골랐다.

지방의 몰락한 관리의 딸인 서태후가
쉽게 다룰 수 없는 명문가 출신의
며느리인 황후는 눈엣가시였다.
언젠가 황제가 성인이 되어
친정을 시작할 때쯤
황후의 가문은 득세하고
자신은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될 것은
보지 않아도 훤한 일이었다.


관광객들 .. 이 이화원으로 많은 관광 수입을 올리고 있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서태후는 며느리인 황후와 황제 사이를 갈라놓고
끊임없이 황후를 구박하였다.
또한 황제의 관심을 정치에서 돌려
환락에 빠져들게 하였다.
동치제는 서태후의 사주를 받은 환관의 손에 이끌려
궁궐 밖 홍등가에 드나들었다.

열락의 세계에 빠져 허우적대던 황제는
마침내 몹쓸 병에 걸린다.
황제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은
서태후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미 동치제는 아들 이전에
권력을 뺏으려는 라이벌이었다.

서태후는 동치제가 치료받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죽어 가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황제가 죽고 나자
아이를 가진 황후를 구박하여 자살하게 만든다.
서태후의 눈에는 황후의 뱃속에 든 아이마저도
손자라는 애틋한 마음보다는
미래의 경쟁자이기에 없애버려야 할 존재였던 것이다.

황제 위의 권력

권력 앞에 모성애마저 버린 비정한 어머니,
서태후는 동치제를 이을 다음 황제로
함풍제의 동생과 자신의 여동생 사이에서 난
광서제를 골랐다.

광서제​




​서태후는 광서제의 큰어머니이자 이모였다.
즉위 당시 광서제의 나이는 불과 네 살이었다.
여타 성인 황족들을 물리치고
구태여 네 살의 광서제를 황제로 고른 것은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통해
계속 중국을 다스리겠다는 의지 표명에 다름 아니었다.

광서제는 친아들마저 희생시킬 수 있는
비정한 서태후에게 주눅 들어
기 한번 펴지 못하고 자랐다.
황후의 간택에도 마음에 둔 여인이 따로 있었지만
결국 서태후가 골라준 서태후 가문의 여인을
황후로 맞아야만 했다.

1889년 서태후는 동치제와 광서제에 이은
오랜 수렴청정 끝에 광서제를 결혼시키면서
뜻밖에 황제의 친정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자금성 북쪽에 새로 지은
이화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외형상으로는 광서제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뒤로 물러 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외형상’ 일 뿐이었다.
이미 궁궐과 조정에는 서태후의 사람들뿐이었고
광서제는 자주 이화원으로 문안인사를 가서
서태후에게 국정을 보고하고 지시 받았다.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끝낸 것은
이미 수렴청정이라는 형식이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발을 드리우건 걷어버리건
중국을 통치 하는 것은 광서제가 아니라
서태후였고 그녀는 황제 위의 최고 권력이었다.

자금성보다 규모가 큰것으로 느껴진다.

 


변법자강운동의 실패와
수렴청정의 재개
그러나 명목상이든 허수아비든 간에 ​​
중국의 황제는 광서제였다.
이제 어엿이 성인이 된 광서제는
자신의 나라를 자기가 직접 통치하고 싶었다.

서태후의 전횡으로 기울어가는 청조도
광서제에게는 큰 걱정이었다.
광서제는 청일전쟁을 통해
황제의 좁은 입지를 벗어나보려 했다.
그는 서태후를 졸라 청일전쟁을 일으켰고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예상 외로 강했다.
거기에다가 청일전쟁에서의 승리가
광서제의 입지를 넓혀주는 계기가 될 것을
두려워한 서태후의 방해 공작도 있었다.

서태후는 전쟁 중에 군비의 일부를 빼돌려
이화원을 치장하는 데 썼다.
청일전쟁은 청나라의 어이없는 패배로 끝이 나고
청나라는 세계 만방에
자신들의 국력이 형편없음을 알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열강의 압박은 심해졌고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된다는 분위기가
청나라 지식인 사회에서 형성되었다.
광서제는 이 지식인층의 새로운 분위기에 적극 동조했다.
그들의 의견을 수용함으로써
나라도 부강하게 하고 서태후로부터
벗어나보자는 것이 광서제의 속셈이었다.


다리난간의 돌 사지들...





캉유웨이, 링치차오(양계초)를 비롯한 많은 지식인 학자군이
시대에 맞지 않는 법과 제도를 고쳐 나라를
부강하게 하자는 취지로 변법자강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이들의 개혁운동은 서태후와
그녀를 둘러싼 보수파들에 의해 번번이 방해를 받았다.
서태후 세력을 몰아내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개혁파와 광서제는
당시 군부세력으로 뜨고 있던 위안스카이를 끌어들였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겉으로는
개혁파에 동조하는 척 할 뿐
뿌리 깊게 이해타산을 따지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쪽이 어디일까 주판알을 튕겼고
서태후를 선택했다.
그는 서태후의 애인 영록을 찾아가
광서제의 모든 계획을 낱낱이 고발했다.

그렇지 않아도 광서제와 개혁파의 행보가
마음에 들지 않던 서태후는 이때를 기회로 삼았다.
그녀는 광서제를 자금성 영대에 유폐시켜 버리고
그를 도와 변법자강에 나섰던 지식인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처형했다.

캉유웨이를 비롯한 일부는 해외로 망명하여
목숨만은 건졌지만,
어쩌면 청조의 마지막 시도였을지도 모를
변법자강운동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을 맺고 말았다.
무술정변 후에 모든 견제 세력이 사라진 조정에
서태후의 독무대가 차려졌다.
비록 명분상으로는 수렴청정이 다시 시작된 것이었지만,
서태후에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을 것이다.

서태후의 사치와 향락은 중국 역사상에도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사치와 향락의 나날
정치에서 최고 권력을 가졌던
서태후였던 만큼
그녀는 어린 시절의 가난에
복수라도 하듯 사치를 즐겼다고 한다.
서태후의 사치와 향락은 중국 역사상에도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가 먹는 음식은 한 끼에 128가지나 되었다.
돈으로 환산하면 백은 100만 냥이었다.
이것은 당시 중국 농민의 약 1년 치의
끼니에 해당하는 정도의 금액이었다.

옷은 3000여 상자나 되어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갈아입고 다녔고
특히 보석에 대한 애착이 대단하였다.
언제나 비취와 진주로 머리 장식을 했으며.
비취 구슬과 진주를 매단 옷을 입었다.
비취 팔찌, 비취 반지뿐 아니라
손톱에까지 비취 보호판을 달았다.
식탁도 비취로 만든 식기들로 차리게 했으며,
비취로 악기를 만들어 연주하게 하였다.

이화원

 

 

서태후가 부린 사치의 가장 극단적인 예는
바로 현재까지도 중국의 대단한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는 이화원이다.
서태후는 청일전쟁 중에 함대를 만들 돈을 빼돌려
자신의 처소인 이화원을 치장하였다.
나라의 존망이 달린 전쟁 중에도
오로지 처소 꾸미기에 급급했던 서태후의 배짱은
크다면 크고 달리 보면 황당하기까지 하다.
이화원은 현재까지도 그 화려함에 혀를 내두르게 되는데,
특히 인공으로 파낸 호수는 마치 바다와도 같다.

국가 최고 권력에 오른 서태후에게
황제의 후궁으로서 지켜야 할 정절 같은 건
콧방귀꺼리도 되지 않았다.
함풍제가 죽고 27세에 젊은 과부가 된 서태후는
권력을 잡자마자 고향에 버리고 온 애인,
영록을 불러들였다.
영록은 평생의 그늘 속 애인으로 머물면서
그녀의 사치와 향락을 뒷받침하였다.
서태후는 영록 외에도
마음이 내키면 언제든지 남자를 취했고,
수시로 갈아치웠다고도 한다.

위안스카이

 

청나라의 운명과 함께한 서태후의 죽음​
그 어떤 정적도 두렵지 않고
외세의 압박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던 철의 여인 서태후도
이겨내지 못할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세월이었다.
그녀도 나이 들어 노쇠해졌고
극심한 사치와 향락은
노인에게 오히려 독이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몇날 며칠 동안 계속된 자신의 생일잔치에서
너무 많은 음식을 먹은 서태후는 이질에 걸린다.
그보다 며칠 앞서 10년간 유폐되어있던 광서제는
위안스카이가 보낸 보약을 먹고
38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위안스카이가 보낸 약은 보약이 아니라 독약이었다.


선통제 부의




광서제의 죽음을 전해들은 서태후는
매우 담담해했다고 한다.
그리고 역시 독단으로 광서제의 동생인
순친왕의 불과 세 살 밖에 안 된 아들을
다음 황제로 지목했다.
그가 바로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 부의였다.
세 살짜리 부의를 선택했을 때
서태후는 곧 병을 털고 일어나
수렴청정을 이어갈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노령은 이질을 이기지 못했다.
서태후는 광서제가 죽고 얼마 되지 않아
살아생전 그토록 핍박했던
조카를 따라 유명을 달리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마지막 유언은
다시는 여자가 정치를 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서태후의 죽음과 함께 청조도 곧이어 망하고 말았다.
1911년 일어난 신해혁명으로 쑨원(손문)을
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이 탄생하고
중국은 새로운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서태후가 만든 보수적인 정치 풍토는
새롭게 다가오는 서구 세력에
순발력 있게 대응하지 못했고,
황실과 주변 귀족의 사치와 향락은
백성을 몰락으로 이끌었다.
서태후 사후 몇 년 지나지 않아 중국은
서구열강의 손아귀에서 농락 당하는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된다.